| '파파괴' 하영… 증조부 안상호, 113년 전 日잡지에 '모범 조선인'으로 등장 [이슈&톡] |
| 2026. 08.19(수) 1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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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김진석 기자] '증조부 친일' 의혹으로 비판받고 있는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가 지난 1913년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에서 '일선동화의 선구'로 소개된 사실이 전해졌다. 19일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친일 단체 활동 이력으로 논란이 불거진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가 이미 1913년부터 일본인 사회에 '일선동화의 선구(日鮮同化の魁)'로 소개됐다. 당시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은 안상호를 "본래 운 좋은 남자"라고 평가하며 "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조금도 일본 내지인과 다르지 않다"라거나 "2~3년 사이에 택지도 생겼고, 전답도 생겼다"라고 설명하며 조선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의 결혼생활을 조명했다. 특히 언급된 '일선동화'는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뜻하는 말이다. ◆ '조선공론' 안상호 향해 "말씨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다르지 않다" 1913년 9월 발행된 일본어 잡지 '조선공론' 제1권 제6호에는 '일선동화의 선구 조선인 남편·일본인 아내 평판기'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조선공론'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발행된 일본어 종합 잡지로,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주요 독자로 삼았다. 해당 기사에서 안상호는 '일선동화' 사례로 첫 번째로 소개됐다. 경성에 위치한 안상호의 진료소를 찾아가 필자는 남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통으로 향하면 조선식 가옥 사이로 한층 높이 솟은 서양식 건물이 나타난다며, 그곳에 '의학득업사 안상호'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고 소개했다. 당시 안상호의 외모와 태도에 대한 묘사도 담겼다. '조선공론' 측은 안상호를 마르고 작은 체구에 짧은 머리를 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말씨에서부터 태도까지 일본 내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안상호의 의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됐다. 도쿄 자혜의원 의학교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 경성에서 개업했으며, "조선인에게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재기가 넘치며 대단히 근면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환자가 몰려 진료소 앞이 시장처럼 붐볐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안상호 향해 日 "본래 운 좋은 남자… 2~3년 사이 택지도, 전답도 생겨" '조선공론'은 안상호와 일본인 아내 가와구치 이소코의 결혼 과정도 상세하게 소개했다. 당시 안상호는 다카기 가네히로의 추천으로 당시 일본에 머물던 의친왕 이강의 의사가 됐고, 이소코는 의친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후 안상호가 의친왕에게 결혼 의사를 밝혔고, 의친왕의 승낙을 받아 1907년 3월 부부가 됐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잡지는 안상호를 "본래 운이 좋은 남자", "복이 많은 남자"라고 표현했다. 결혼 이후 안상호의 가정과 재산이 늘어난 과정도 기록했다. 잡지는 "안상호의 진료소는 날로 번창했다"며 "2~3년 사이에 택지도 생겼고, 전답도 생겼다"고 적었다. 안상호가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보유했다는 기록은 이후에도 확인된다. 1926년 '매일신보'에는 시흥군 일대에 위치한 안상호 소유 산림 10만여 평을 일본인 관리인이 관리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안상호와 가족을 일본식으로 살아가는 '모범' 사례로 소개한 기록도 이어졌다. 1913년 '조선공론'은 안상호가 자녀들을 "순일본 내지식으로 양육하고 있다"고 전했다. 1918년 '매일신보' 역시 안상호와 그의 가족을 '일선동체의 가정'으로 소개했다. 당시 안상호는 자신을 "일본 사람과 똑같다"고 표현하며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됐다. 또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어 불편할 것도 없다"라고 적었다. ◆ 대정친목회 평의원 활동…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행적 명백" 안상호를 '모범 조선인'으로 주목한 기록은 1913년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07년 6월 일본 의학 전문지 '의해시보' 제677호에는 일본인 의사 사토 스스무가 안상호를 대한병원 의사로 채용하기 위해 봉급 예산까지 편성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사토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안상호의 채용 문제를 상의했고, 안상호 같은 인물을 중용하면 조선의 의학교육에서 "자연히 모범"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안상호는 1916년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목 및 융화를 내세운 대정친목회 평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 경성부 협의회원, 경성 종로금융조합장 등을 지낸 기록도 확인된 바 있다. 이와 관련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4일 공식 입장을 통해 "안상호의 친일 행적은 명백하다"라고 밝혔다. 연구소는 대정친목회 평의원 활동과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 참여 등을 주요 행적으로 제시했다. 특히 1918년 '매일신보'에 실린 안상호의 발언 등을 근거로 그를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2009년 발간 당시 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선정 기준에 미달해 수록을 보류한 것"이라며 사전 미수록이 친일 행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선대의 과오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비난에는 선을 그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식민지 협력의 역사와 이에 대한 인식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하영 소속사 측은 1913년 '조선공론' 기록 등을 토대로 안상호의 행적에 대한 입장에 대해 공식적으로 답변하지 않은 상황이다. 하영은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리고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며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친일 행적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증조부를 가족의 자랑처럼 언급한 점을 반성한다고 전했다. [티브이데일리 김진석 기자 news@tvdaily.co.kr/사진=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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