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염혜란이 피어낸 역사 속 아픔 [씨네뷰]
2026. 04.14(화) 08:00
염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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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한서율 기자] 망각의 늪에 빠진 과거는 이름 없는 유령이 돼 현재를 떠돈다. 기억되지 못한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대물림되고, 국가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아래 으깨진 개인의 삶은 역사의 갈피 속에 파묻힌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은 '이름'이라는 가장 쉬운 소재를 통해 역사의 아픔을 잊은 이들과 다시 마주한다.

오는 15일 개봉하는 영화 '내 이름은'(감독 정지영)은 평생 자신의 과거를 지운 채 살아온 어머니 정순(염혜란)과 촌스러운 이름이 불만인 18세 아들 영옥(신우빈)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홉 살 이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정순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1949년 제주의 참혹한 진실과 마주하는 서사를 담았다.

이 작품은 정순을 잠식한 고통의 실체를 파헤치며 역사 속 아픔을 그려낸다. 정순은 4.3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가족의 죽음 등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스스로를 속여야만 했던 죄책감은 뇌에 돌이 박힌 듯한 극심한 트라우마가 돼 70년 넘는 세월 동안 그를 괴롭혔다. 영화는 가상의 한 인물의 인생을 그리며 제주도민의 뿌리 깊은 상처를 관객 앞에 드러낸다.

작품의 핵심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이지만, 그렇다고 역사 속 한 장면만 조명하지 않는다. 정순의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된 폭력의 궤적과 같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와 무너진 남편, 1980년 5월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딸 미숙까지, 정순의 가족은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영화는 홀로 살아남은 정순을 통해 기억 저편에 남겨진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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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49년의 제주에서 일어난 국가적 학살과 1998년의 교실 속의 갈등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과거 사건을 최근 대두되고 있는 사회 문제로 치환해 현세대에게 제주 4.3 사건의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장치한 것이다.

그러나 4.3 사건과 학교 폭력이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촘촘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역사 속 아픔에 초점을 맞춘 영화임에도 학교 내부 갈등과 관련한 서사나 분량이 과도하게 많아 극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려있다. 두 사건의 단순한 병치도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4.3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와 학생들의 다툼이 영화의 중반부까지 독립된 이야기로 진행될 뿐 아니라 피해 규모가 다른 두 사건의 무게감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지탱하는 힘은 배우 염혜란의 압도적인 존재감에서 나온다. 그는 가해와 피해, 방관의 경계에 서 있는 정순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한 결로 완성했다. 특히 갈대밭에서 모든 기억을 찾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영혼들에게 속죄하며 한풀이 춤을 추던 염혜란의 모습은 한 평생의 고통받은 인물의 감정을 그리며 영화의 백미를 만들어냈다.

'내 이름은'은 단순히 과거를 복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우리를 극 안으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역사 속 아픔을 경험하고 공부하게 만든다. 제작비를 후원한 1만여 명 시민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영화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영화는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기리며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를 묵직하게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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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한서율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CJ CGV, 와이드릴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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