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장항준 감독 인복 터졌다…연출 빈틈 뚫고 나오는 '연기 차력쇼' [씨네뷰]
2026. 02.04(수) 08:00
왕과 사는 남자
왕과 사는 남자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하루아침에 하늘이 바뀌었다. 정치적 비호 세력을 모두 잃은 어린 왕은 숙부에게 한순간에 왕위를 빼앗겼다. 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선왕의 자리마저 신하들의 복위 운동으로 잃어버리고,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났다. 마을의 안녕이 최우선인 촌장은 유배 온 인물이 누군지도 모른 채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복덩이인 줄 알았던 그가 폐위된 왕이었으며,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 재앙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이다.

달포를 넘기지 못할 거라던 어린 선왕의 유배 생활은 마을 사람들과의 끈끈한 유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명회의 서늘한 그림자가 청령포를 덮치며, 이들의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비극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한다. 역사가 지우려 했던 어린 왕과, 가장 밑바닥의 백성이지만 그 왕을 누구보다 충심으로 섬겼던 촌장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다.

4일 개봉되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왕으로 기록된 단종과 그를 유일하게 품었던 청령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팩션 사극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지로 쫓겨난 어린 단종(박지훈)과 마을의 부흥을 위해 그를 받아들인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만남을 시작으로, 권력의 비정한 칼날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애와 정의를 조명한다. 배우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이 의기투합해 역사의 빈틈을 따뜻한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영화의 가장 큰 덕목은 배우들의 힘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박지훈과 유해진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설득력이자 몰입도다. 두 배우는 각기 다른 온도로 시작해 결국 하나의 뜨거운 점으로 수렴하며, 관객을 1457년의 청령포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서사의 흐름을 쥐고 흔드는 이들의 연기 내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다.

특히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의 존재감은 가히 파격적이다. 첫 등장부터 이미 단종 그 자체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낯선 유배지로 밀려난 소년 왕의 처연함과 무력감, 그리고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분노까지 단종의 다양한 감정선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박지훈은 많은 대사 대신 깊은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로 복합적인 감정의 층위를 섬세하게 쌓아 올렸다. 소년의 얼굴에 드리운 왕의 무게를 이토록 탁월하게 표현할 배우는 박지훈뿐이다.

단종이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점차 왕의 자질을 각성해 가는 과정에서 박지훈의 섬세한 완급조절도 인상적이다. 초반의 유약했던 모습에서 점차 단단한 음성으로 변모해 가는 디테일은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일등 공신이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는 기품을 유지하는 박지훈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그를 ‘지키고 싶은 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마을 촌장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극의 톤을 조율하는 완급 조절의 장인이다. 초반부 마을의 부흥과 이익을 위해 계산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단종의 왕재(王才)를 알아보고 서서히 감화되어 가는 과정은 유해진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을 입고 생명력을 얻는다. 가벼움과 진지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의 연기 덕분에 관객은 엄흥도의 심경 변화를 거부감 없이 따라가게 된다.

무엇보다 두 배우가 쌓아 올린 관계성은 이 영화의 백미다. 처음에는 각자의 목적이 달랐던 단종과 엄흥도가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과정은 배우들의 호흡으로 촘촘하게 채워졌다.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의 교류가 있었기에, 역사가 곧 스포일러인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도 기어이 관객의 눈물샘을 터뜨리고 만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마지막 울림은 묵직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

여기에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극의 긴장감을 조율하는 강력한 축이다. 기존 미디어에서 그려진 책략가 이미지에 더해, 압도적인 피지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등장만으로도 스크린을 장악한다. 엄흥도, 단종과 대척점에 서서 분량 이상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는 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완성하는 또 다른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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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배우들이 빚어낸 이토록 완벽한 앙상블에 비해, 이를 담아내는 연출의 그릇은 다소 투박하여 아쉽다. 가장 큰 문제는 불균일한 톤이다. 영화 초반, 단종의 비극적인 서사와 엄흥도의 희극적인 톤이 교차 편집되는 과정에서 극의 온도는 급격하게 널뛴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유기적으로 섞이지 못하고 겉돌아, 관객이 극의 정서에 온전히 안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몰입을 깨뜨리는 기술적인 완성도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단종의 각성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호랑이 CG는 조악한 퀄리티로 인해 비장해야 할 순간의 긴장감을 오히려 반감시킨다. 또한 장항준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는 이번 작품에서 유효타를 날리지 못한다. 반복되는 패턴의 유머는 서사의 무게감을 덜어내기보다 억지스러운 쉼표처럼 느껴져 극의 흐름을 뚝뚝 끊어놓는다.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단종 복위 운동 시퀀스의 연출 방식 또한 전형적인 작법에 머물러 있다. 인물의 비장미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천둥 번개를 동원하는 식의 연출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다소 촌스럽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영화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야 할 복위 운동 장면에서의 편집은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어, 관객이 감정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과 사는 남자’는 스크린을 통해 확인할 가치가 충분하다. 연출의 한계가 명확함에도, 그 빈틈을 기어코 감동으로 채워 넣는 배우들의 저력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박지훈의 눈빛과 유해진의 진심은 연출의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먹먹하다. 비록 연출은 아쉽지만, 배우들의 명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하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영화 '왕과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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