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 하영 家가 건드린 역린 [이슈&톡] |
| 2026. 08.22(토) 1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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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내용 요약 신예 배우 하영, 친일파 집안 논란 전 국민은 왜 분노했나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계급 사회 구성원들의 역린(逆鱗, 용의 비늘)이란 “내가 (못나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다”는 설움이 아닐지 생각한다. 한국이야말로 그렇다. 전 국민이 타자와의 부단한 계급·매력·자본 갈등에 이골이 난 터. 촉망받는 신예 여배우 하영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정황 탓이다. 공분의 핵심은, 이 같은 매국 친일파들이 조선·일본의 대조적 케파(capacity)를 약게 가늠해가면서 부흥을 꾀했다는 점이다.
구한말 공문서 사료에 따르면 하영 증조부 안상호의 유년기는 불우했다. 조실부모로 가난에 시달렸던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1895년 갑오개혁 주역 김홍집이 추진한 조선 제1세대 국비유학생에 발탁된 것인데, 격변하는 정쟁 속 안상호를 비롯한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은 순식간에 일본 내부의 불순분자로 찍히기도 했다. 다만 유학 당시 이미 도쿄 자혜의원의학교(현. 도쿄지케이회의과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이방인의 낙인을 지워내려 본격적인 친일 협력 길을 걷는다. ▲러일전쟁의 군의관 격으로 활약하며 일제 제국주의에 영합했는데, ▲앞서 대한제국이 의료인으로 성장한 그의 귀속을 요청했지만 이를 한사코 거부, 탈주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의 의학교가 대한제국 대한의원으로 통합되자 강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결정적으로 1916년 핵심 친일파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 간부로 승격한다. 결국 1918년 매일신보는 당시 일본인 아내와 가정을 꾸렸던 안상호의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옷도 없고 매운 음식도 못 먹는다”는 인터뷰 사진까지 보도했고, 이는 일본이 흡족해 한 ‘일선동체’ 모범 사례였다.
일말의 동정도 무리는 아니다. 배를 곯았던 10대가 살기 위해 강자 편에 선 것이라면 어찌 파렴치한 죄악으로만 물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례가 있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의학생 김익남이야말로 안상호와 비슷한 처지임에도 조선인으로서의 근본을 지켰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귀속을 요청하자 즉시 귀국해 32명의 국내 의료진 후발주자를 꾸린다. ▲이윽고 최약체였던 대한제국 육군 군의장을 맡아 군진의학 토대를 다졌고 ▲대한제국 의사단체 ‘의사연구회’를 설립해 일본 의학에 맞섰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참여했던 정재홍 의사를 추모하는 사업에 동참하던 중, 그는 끝내 총독부의 증오를 사면서 의사 라이센스마저 빼앗겼다. 이에 대해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황 씨는 “의료계와 교육계, 군진의학 요직을 거친 김익남은 일제가 적극 포섭하려 했을 인물”이라며 “그럼에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가 일제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설명한다. 같은 환경에 놓인대도 사람마다 몹시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하여 강자와 결탁했던 친일파들만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다. 후손들이 현재까지 소유한 금싸라기 땅만 서울 기준 70%, 무려 4억4천만m²로 추산된다.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무르익은 자본주의는 오늘날 선진국들의 필연적 배금주의를 낳았다. 무역의 자유화에 따른 단순노동 소멸과 임금 격차, IT와 디지털 혁명에 따른 디지털 격차, 자본의 자유 소유권에 기인한 자산 격차에 따라 피라미드의 중산층이 약화되고, 반면 상위층과 하위층 간 양극화만이 심화됐다. 그런데 근현대사의 일제 강점기 특수성에 따라, 대한민국 계급 지도에는 성실한 인재의 가치를 훼손하는 친일 불순물까지 끼어들게 됐다. 이들의 매국 행적은 거대한 대물림 자본 고리를 구축했고, 자연스레 프롤레타리아(무산 노동자 계급)들이 자산을 늘릴 기회도 급감했다. 강남구 청담동 출신 A씨(女, 55)의 조부 역시 유명한 친일파였다. 막대한 재산으로 말미암아 그는 부친이 둔 첩의 셋째 딸, 즉 서녀로 살았다. '집안 재산이 수 천 억에서 조 단위'라는 귀엣말까지 들었다는 그는 “어떻게 부를 증식했냐”는 질문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원래 돈이 많았다”고 답했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이처럼 자신이 부자가 된 전말을 모른다.
‘다이아 수저’ 하영의 생계·뒷배 걱정 없는 연예계 생활도 마찬가지다. 하영은 영문도 모른 채 예능에서도 난데없이 친일 증조부를 발설했을 것이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안상호가 경기 안양, 군포 일대에 2,700평 대토지를 소유했음에도 하영의 의사 부친, 안병문 원장이 여유로만 일관하는 정황. “우리 집은 몇 안 되는 의료 명문 (중략)…세월이 우리 편에 서서 고맙게 흘렀다”(2002, 중앙일보 기고문)는 장기간의 안락함마저 드러냈다. 통상 친일 가문의 기성세대는 나라가 토지를 환수한들 2005년부터 대형 소송을 통해 이를 되찾기를 반복했다. 즉, 선조의 매국을 당시 신지식인의 격조로 합리화 하며, 독립운동가 후손과 국민들의 배덕감이 옅어지기를 소요해 왔다. 이 와중 8090년생인 한국의 마지막 개천 용들은 “나라가 해 주는 게 없다. 소득 탓에 모든 특혜에서 제외”라는 볼멘소리를 터뜨리고, 한국인들의 민감한 역린까지 꿈틀거렸다. 세월은 어째서 늘 강자의 편이기만 한가. 정의는 존재하려나. 자본만이 범부들의 팔 할 행복을 결정할 텐데, 권선징악은 이미 구전 설화 속에나 맴도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상기 내용만으로 안상호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단정할 순 없으며 향후 추가되는 역사 기록의 면밀한 검토에 따라 인물은 재평가 될 수 있습니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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