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뮤지컬이 마냥 좋았던 열 살 소녀는 어느덧 데뷔 19년 차, 스물일곱 살 배우가 됐다.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인 아버지의 보며 무대 위 삶을 꿈꿨고, 이제는 자신만의 길을 올곧게 걸어 나가고 있는 배우 이아진을 만났다.

이아진은 지난 5월 개막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출연하고 있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굿맨 패밀리' 가족 구성원들의 아픔과 화해,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와 그의 병이 온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탄탄하고 치밀한 드라마, 록 음악으로 풀어내며 뮤지컬로써는 이례적으로 2010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이아진

이아진은 굿맨 가족의 딸 나탈리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 다이애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흔들리는 가정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아빠 댄, 다이애나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들 게이브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을 사랑해 달라 외치는 소녀다.

7년 만에 무대에 돌아온 '넥스트 투 노멀'은 이아진의 '오랜 꿈'이었다. 과거 아버지 이정열이 댄 역할을 맡아 작품에 참여했고, 고등학생이던 딸 이아진은 이 작품을 마음속 버킷리스트 1순위에 올렸다. 언제나 출연하고 싶은 작품을 묻는 질문에는 '넥스트 투 노멀'을 꼽았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오디션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출연 소식에 마니아들은 금수저를 빗댄 '넥수저'라는 별명까지 만들어 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아진은 "이 작품이 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너무 큰 위로가 됐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매력적이었고, '모든 고난이 다 지나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더라"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연기하는 나탈리는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실은 비틀린 가정환경 속에서 사는 소녀다. 이아진은 "나탈리는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터지기 일보직전, 끓어 넘치기 직전의 위태로운 아이"라며 "누구보다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심적으로 약하고, 붙잡을 곳도 없고, 의지하는 방법도 몰라서 더욱 위태로운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괜찮은 척 의연하게 행동하는 부분을 강조해 연기하려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아진은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 아이는 누군가의 손길과 사랑, 도움이 필요한데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자라서 자신의 감정 표현에 서투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라며 "공부도 피아노도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그것조차 결국은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 완벽한 삶의 이유가 부모의 눈길 한 번 더 받기 위해서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 가족들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아진은 나탈리가 등장하는 첫 장면 대사 속 겨울 연주회 장면을 언급했다. 극 중 나탈리는 겨울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쳐 대학에 조기 입학하고,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나탈리는 연주회가 집을 떠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마 아빠의 눈을 한 번이라도 자기에게 오게끔 하려던 행위가 아닐까 싶다"라며 "정말로 부모님이 연주회를 보러 오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면, 나탈리가 그렇게까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괜찮은 척을 하는 아이였을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모든 역할을 만날 때 '나'에서 출발을 하는 편"이라는 이아진은 "여느 사춘기를 겪는 소녀들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10대 아이인 나탈리이기에 그 경계를 연기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분노나 슬픔에 대한 감정을 폭발적으로 표출하는 성격이 아니다. 혼자서 삭히다 보면 괜찮아지는 편이다. 나탈리 캐릭터도 처음에는 그런 방법으로 접근했었는데, 연출님이 '이미 인생을 몇 번 산 사람 같다'라며 10대 소녀임을 잊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결국은 더 많이 감정 표출을 해보면서 중간 지점을 찾아가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나탈리와 제 안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아득바득 참아내고 이겨내는 성격이 많이 닮아있더라고요. 차이점이 있다면 저는 맛있는 걸 먹는다던가, 하루 종일 쉰다던가 하는 저만의 해결 방법이 뚜렷하게 있지만, 나탈리는 그저 '이 집만 떠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는 아이예요. 자신의 깊은 내면까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보면 나탈리는 마냥 안쓰러운 아이죠. 주위에 도와 달라고 말해도 되고 엉엉 울어도 되는데, 그걸 티 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모습이 안쓰러워요. 나탈리를 직접 만나다면 '울어도 된다'라고 꼭 알려주고 싶죠."

그는 "나탈리가 결국 자신 만의 해결 방법을 찾아내 어떻게 해서라도 행복을 찾았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픔을 묻어두고 그저 괜찮다고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상처를 꺼내 직접 대면하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이라는 이야기를 제시하는 극이니 만큼, 나탈리 또한 자신들의 상처를 마주 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큰 한 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라는 것. 또한 나탈리로서도 관객들에게 "두려워서 꺼내지 않으면 상처는 더 곪고 깊어진다. 꺼내고 인정해서 마주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이아진 최정원

이아진은 "지금 이 팀에서 나탈리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다"라며 꿈의 무대에 선 소감을 전했다. "첫 공연 때는 무대 위에서 내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긴장을 해었는데, 이제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공연이 끝나 있는 것 같다. 매번 회차가 줄어드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하게 공연을 하고 있다"라고 웃어 보였다.

또 다른 '댄'이었던 아버지 이정열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아진은 "예전에는 아버지의 후광을 피해 도망 다녔다면, 이제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무대에서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보다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 전작인 '이상한 나라의 아빠' 속 부녀 역할도 함께 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스케줄 상의 문제로 '넥스트 투 노멀'에서의 부녀 상봉은 무산됐지만, 그는 "오히려 아버지가 안 계신 유일한 시즌에 내가 합류하게 된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외국 스태프들에게 "마이 나탈리"라고 소개해주던 아버지에게, 자신이 온전히 연구하고 그려낸 나탈리를 선보일 수 있어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넥스트 투 노멀'에 참여한다는 꿈이 이뤄진 지금, 이아진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현재 뮤지컬 '차미', '유진과 유진'에 함께 출연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너무나 좋은 작품들에서 메시지를 통해 위로받고 있다. 에너지가 소진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이 얻어 가고 있다"아며 "이제는 버킷리스트를 적고 그 빈칸을 채워 넣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그저 내가 또 어떤 작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기다려지고 궁금하다. 몇 달 뒤 제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다"라고 이야기했다.

"벌써 스물일곱 살이냐고 친구들은 그러는데, 저는 제가 서른 살이 되면 어떨지 궁금하거든요. 결국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어떻게 하면 더 재밌고 행복하게 보낼지 기대가 돼요. 하루하루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루고 있어요. 앞으로도 행복하게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이 제 새로운 꿈입니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이아진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 엠피앤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