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몇몇 논란에도, ‘미스터 션샤인’이 비추는 세계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 가장 큰 감탄은 김은숙 작가의 필력애서 온다. 덕분에 드라마의 모든 순간이, 아무리 남루하고 서글픈 순간일지라도, 낭만의 색감을 띠고 더없이 고상하고 우아하게 번역된다.

의뭉스러움을 딛고 비로소 tvN ‘미스터 션샤인’(연출 이응복, 극본 김은숙)이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여전히 작위적인 낭만만 짙게 드리우기 위해 괜스레 구한말 시대를 끌어온 게 아닐까 싶다만, 보다 보니 설득되었는가. 아무리 위기에 위기가 더해진 때라고 해도 당시의 세계를 휩쓴 낭만이 위기의 조선이라고 없었을까,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잡아 끈 요소는 세련된 필치의 대사들이다. 각각에 담긴 작가 나름의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눈여겨볼 만 하다. 일례로, 손녀 고애신(김태리) 덕에 양인 유진 초이(이병헌)와 왜인 구동매(유연석)에게 도움을 얻는 고사홍 대감(이호재)의 한 마디가 있다. “양인(洋人)의 옷을 입은 자와 왜인의 옷을 입은 자가 각각 나를 찾아와 위험을 알렸다. 대관절 나는 조선 땅에서 누구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인가.”

외부의 욕망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애를 쓰는 고사홍에겐, 조선인의 얼굴을 한 양인이든 왜인이든 하나같이 조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그는 이완익(김의성)으로 인해 시국이 점점 험악해지자 국권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되고자 조선 팔도 각지의 지각 있는 선비들에게 서신을 띄어 보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며칠을 기다려도 회답하는 자 없고 고사홍은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인다.

실상은 조선인의 얼굴을 한 조선인이지만 속은 양인이자 왜인인 이완익이 사람을 시켜 중간에서 그의 서신들을 몽땅 가로챈 것. 이 와중에 양인인 유진은 자신을 보호해주겠다 하고 왜인인 구동매는 회답 없던 서신의 행방을 알려주어 영영 잃어버릴 뻔한 희망을 되찾게 하니, 고사홍에게 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정작 조선인의 얼굴을 한 조선인은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자신을 없애려 하는데, 양인과 왜인의 옷을 입은 이 자들은 구하려 한다. 이처럼 역설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작가의 깊숙한 질문을 엿듣는다. 진짜 조선을 위협한 것은 무엇이었냐는.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군침을 흘리며 들어온 각 나라들과 일본, 그리고 이 사이에서 이득을 보겠다고 이것저것 다 팔다가 종국에는 나라까지 파는 사람들, 즉, 자신의 삶만 가엾고 아깝고 더없이 소중한 이들의 왜곡된 이기주의, 타인을 사랑할 줄도 긍휼하게 여길 줄도 모르는 잔혹한 세계관, 물질 중심의 가치관 등이 바로, 고사홍을 위협하고 조선을 위협한 존재들이다.

이 본질적인 질문이 김은숙 작가만의 농익은 필체를 덧입고 낭만 가득한 대사로 재탄생했다. 김희성(변요한)이 신문사를 차린다며 덧붙인 말, “할아버님의 치부책에 적힌 이들에게 자본금을 뜯어내고 있습니다, 제 몫으로 주신 거니까 잘 쓰고 있습니다”는 또 어떠한가. ‘제 몫으로 주신 거니까’,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했던 조부의 넘치는 사랑에 크게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쓰고 있단 소리다. 딱 김희성스러운, 재기 넘치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션샤인’이다. 대사 하나하나에 시대의 고민과 서글픔과 낭만이 깃들어 있는데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나. 역사를 헛되이 가져오지 않았다. 우리 또한 서글픈 역사의 흔적들과 마주하며 드라마 속 인물들과 함께,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며 고민하게 되었으니. 실재했던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할지라도 허구적 낭만을 덧입고 재탄생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라 하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출처=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