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안윤지 기자]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완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다채로운 감정 연기보다는 때론 절제된 표현이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설경구가 절제된 연기로 또 한 번 독보적인 존재감을 증명했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들쥐'(연출 김홍선)는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의문의 존재 '들쥐'에게 모든 것을 잃은 은둔 소설가 제문재(류준열)와 잃어버린 돈을 회수하려는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형사 박순용(이규형)이 들쥐의 정체를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들쥐'는 공개 사흘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영화(비영어) 부문 5위에 등극했다. 설경구는 이러한 인기에 대해 "체감으로 확 와닿진 않지만 좋은 피드백을 보내주면 보고, 아니면 직접 찾아보진 않는다"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설경구가 느낀 '들쥐'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최근 가장 재밌게 본 대본이었다. 다음이 궁금해지고 로드무비 같기도 하더라. 갖춰져 있지 않은 캐릭터가 자유로워 보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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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설경구 |
설경구가 연기한 '노자'는 돈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채업자로, 돈을 갚지 않고 달아난 제문재를 끝까지 추격하는 인물이다.
그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 "작가님은 본인이 쓴 노자보다 더 묵직한 인물을 원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내 연기가 너무 가벼웠나' 싶기도 했다"면서도, "하지만 제문재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암울하다 보니 노자까지 묵직하면 극 전체가 답답해질 것 같았다. 캐릭터에 약간의 가벼움과 빈틈을 주어 시청자들에게 숨구멍을 틔워주고 싶었다"라며 연기 의도를 밝혔다. 이어 "문재를 보면 답답해서 욕이 나오지 않나. 말로 가볍게 혼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싸울 때 만큼은 무섭고 잔인하게 붙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특이한 점은 노자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제문재를 돕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입체적인 면모는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설경구는 "노자는 제문재에게 말을 건네며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던 것 같다. 악행을 저지르기 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문재라는 인물에 투영해 던진 셈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탄생한 노자는 마치 불사조를 연상시킨다. 허술해 보이는 겉모습 뒤로 땅에 묻히거나 총에 맞아도 다시 일어서는 기괴한 생명력과 잔혹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특히 도끼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강렬한 액션은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환갑을 앞둔 나이임에도 처절한 액션을 완벽히 소화해 낸 그는 "액션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몸을 직접 쓰기보다 도끼나 야구방망이 같은 도구를 활용하는 연기가 많아 체력적으로 크게 벅차지는 않았다"라며 겸손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좁은 차 안 뒷좌석에서 세 명이 엉켜 연기할 때는 쉽지 않아 동료 배우들이 몇 번 맞기도 했다. 감독님께서 제 약점은 가려주시고 잘하는 부분을 극대화해 주신 덕분에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라며 연출진과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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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들쥐' 스틸컷 |
작품의 화려한 이야기 속에는 사회를 관통하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들쥐'는 '쥐가 손톱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는 고전 설화에서 출발해, 현대 사회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공포를 건드린다. 극 중 제문재처럼 이름과 주민등록, 비밀번호까지 모든 정체성을 빼앗기는 설정에 대해 설경구 역시 깊은 공감을 표했다. 설경구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게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라며 "디지털 인증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올 공포는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털어놨다.
현실적 공포는 최근 콘텐츠 업계 화두인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소신으로 이어졌다. 그는 "실제 일부 작품에서 AI로 제작된 장면을 봤는데 공포스러웠다. 나와 똑같은 모습이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졌다"라며 기술 오남용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또한 인터넷에서 본 할리우드 배우들의 AI 격투 영상을 예로 들며 "어딘가 기괴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AI로 배우를 대체하기보다, 배우들이 현장에서 안전하게 직접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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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설경구 |
작품과 연기에 대해 이처럼 끊임없이 고민하는 설경구의 열일 행보는 계속된다. 설경구는 오는 23일 개봉하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으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전도연, 조인성, 조여정 등이 합류한 이 작품은 해외 주요 영화제의 초청을 받으며 아카데미 시상식 한국 대표작으로도 출품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이창동 감독과의 재회에 대해 "대본도 보지 않고 전화 받자마자 응했다. 이 감독님과 다시 작업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라며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설경구의 인생작인 '박하사탕'(1999)과 '오아시스'(2002)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박하사탕'은 처음에 무서워서 도망쳤던 작품이었는데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배우에게 터닝포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데뷔 후 수많은 명작을 남겼음에도 설경구는 여전히 연기적 한계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경력이 쌓이면 '연기가 늘 똑같다'는 반응을 들을 때가 있고, 나 스스로도 한계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와 대본에 매달린다. 매 작품이 새로운 시험대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연기하겠다"라며 진심을 전했다.
[티브이데일리 안윤지 기자 news@tvdaily.co.kr/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