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억지로 했던 작품은 없다. 그 말은 곧 모든 작품이 배우 이연에겐 간절했고, 또 소중했다. 그래서 강렬하고 센 캐릭터들의 연속이었지만, 이 마저도 이연에게 자양분이 됐다. 그 자양분을 먹고 자란 이연의 길이 어떤 갈래로 뻗어나갈지, 기대되는 이유다.
26일 개봉된 영화 ‘경주기행’(감독 김미조)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 ‘경주’를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죽이는’ 여행을 떠난 네 모녀의 가족 복수극을 담은 영화로, 이연은 극 중 셋째 딸 동주를 연기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 동생을 위해, 8년 뒤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 여기에 네 자매 중 가장 불 같고, 또 프로 레슬러라는 이색적인 직업까지. 이연이 연기한 동주는 색조로 비유하자면 비비드 컬러에 가깝다. 캐릭터의 개성도 짙고, 서사마저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연에게는 걱정이 없었다. 이미 김미조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 동주라는 캐릭터 구축이 이미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연은 “많은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글로 잘 써주셨기 때문에, 그걸 제 안에서 소화해 보여드리는 게 좋은 선택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거침없었으면 좋겠다”라는 김미조 감독의 한마디를 기둥 삼아, 이연은 시나리오에 담긴 동주를 자신의 안에서 꼭꼭 곱씹었다. 이연은 “그 거침없음의 원동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연이 생각한 동주의 원동력은 사랑을 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믿음직한 첫째, 공부 잘하는 둘째,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넷째 사이에 끼어있는 셋째의 마음으로 한 신, 한 신을 통해 가족들의 사랑을 차츰차츰 얻어간다는 느낌으로 연기했단다.
놀랍게도 이연은 외동이었다. 그렇다고 셋째 동주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연은 “어쩌면 자매들과의 관계가 친구들과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친한 친구들 안에서도 캐릭터가 나뉘지 않나. 워낙 캐릭터성이 있는 자매들이다 보니까 관계성을 잡는 것에 대해서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동주의 거침없음엔 죄책감도 있을 거라고 했다. 이연은 “본인은 아마도 가족들이 내 탓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랑을 더 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8년의 기간 동안 장주(공효진)는 엄마 곁을 지켰다면, 동주는 회피했을 거다. 한국에 있었을지 일본에 가서 지냈을지에 대한 부분은 좀 열어놨다”고 했다.
이어 이연은 “엄마가 8년 동안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너무 변해 있었고 변한 탓이 본인에게도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으려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행동들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김미조 감독이 만든 동주라는 인물에 레이어를 겹겹이 쌓은 건, 이렇듯 이연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었다.
거침없음의 원동력이라는 토대 위에 동주를 쌓아 올리면서, 이연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동주가 홀로 휘파람을 불면서 납치한 백상현(변요한)을 지키는 장면이다. 이연은 그 두 장면에서 동주가 진지하지 않으면 캐릭터의 입체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는 “동주가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가 죽었으면 달랐으려나’라고 대사를 하지 않나. 그 대사를 할 때 저는 그때만큼 긴장되는 순간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동주는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이 여행에 참여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이어 이연은 “이런 대화의 순간이 이들에게 있었을까. 이 여행이 주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동주는 지금이라도 이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분위기 잡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말로 뱉는 건 처음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복수를 대하는 엄마(이정은)와 장주, 영주(박소담), 동주의 자세가 다르다. 임하는 마음도 그렇다. 이연은 네 명 중 장주에게 공감이 갔다면서 “장주의 대사에 공감을 많이 했다”면서 후반부에서 엄마에게 장주가 감정을 터뜨리는 신에 대해 언급했다. 이연은 “저는 그 말이 진짜일 것 같다. 어쨌든 엄마 마음뿐만 아니라 자매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나. 자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까”라면서 “근데 모든 캐릭터들이 이해가 됐다. 그래도 저는 장주가 이해가 많이 됐다”라고 했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 만큼, 이연은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등 선배 배우들과 정말 ‘가족’이 돼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똘똘한 막내’라고 불릴 만큼 이연은 선배 배우들에게 깍듯하게, 또 온 마음은 활짝 열고 다가갔다. 지금도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과 활발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그러면서 이연은 “합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라고 했다.
‘경주기행’을 통해 이연이 가장 깊게 마주한 감정은 소중한 사람의 상실이었다. 실제로는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지만, 직간접적인 연기를 거치며 그 무게를 온전히 흡수했다. 이연은 “잘 익은 민들레가 제 마음속에 있는데 유리병에 보관해 놓은 느낌이다. 뚜껑을 열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 경주는 그런 것 같다”며 털어놓았다.
강렬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온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전혀 없다. 이연은 “좋은 시나리오 안에서 저에게 성장을 가져다주고 좋은 분들이랑 할 수 있다면 센 캐릭터여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앞으로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아주 깊고 슬픈 이야기다. 그는 “울어야 개운해지는 게 있는데, 한 번 시원하게 울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진정한 행복을 마주하는 인물을 그려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단 한 번도 억지로 임한 작품은 없었다. 오직 마음이 이끄는 훌륭한 시나리오와 함께해 온 시간들은 이연에게 큰 감사함이자 축복이었다. 주어진 자리에서 배우 이연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독보적인 색깔이 생겨났다. 그는 “잘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보면 좋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렇게 이연은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히,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탄탄하게 개척해 나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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