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 아닌 전범선을 보라, 한 친일 후손의 성찰이 시사하는 것 [김지현의 게슈탈트]
2026. 08.19(수)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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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게슈탈트’는 현상을 부분이 아닌 전체적 구조와 맥락으로 파악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단편적인 사실들의 나열을 넘어, 사건들 사이에 숨겨진 유기적 연결 고리를 추적하고 그 흐름 속에서 큰 그림을 읽어내는 데 초점을 두는 코너입니다. 기자의 개인적인 주관이 담긴 칼럼입니다.

"조선 옷은 입지 않고, 한국어는 일체 말하지 않는다"는 일선동화(日鮮同化) 안상호의 외침은 100년 후 부메랑이 돼 자신의 증손녀, 배우 하영에게 돌아왔다. 하영의 '증조부' 발언 후 그의 4대 일가는 모든 족적이 파헤쳐지고 있다. 파묘다.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세간의 푸념을 구체적인 현실로 목도한 대중의 분노가 어찌 쉽게 잠재워질 수 있을까. 이들은 하영 일가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개인들은 제 한계가 어쩐지 시대의 비극과 맞물린 것 같아 혼란스럽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하영을 너머 그 이상의 것에 도달해야 한다. 이 뜨거운 분노가 한 여배우의 멱살을 잡는 것에 그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우선 순위는 고종 독살설의 진위 여부를 논하는 일도, 안상호 일가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일도 아니다. 그건 역사학자와 정부의 몫이다. 우리는 감시자가 되면 된다. 다만 그 전에 우리의 어깨 위에 올려진 숙제가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숙제는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빚이자, 과거와 현재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한 여정의 출발선일 것이다. 너무 거창하지만, 하영 일가 사태를 통해 역사적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게 됐다. 그 무지와 무관심이 비극에 일조한 근원인 것 같아 이름 모를 독립 투사들에게 죄스러웠다. 그런 사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접한 밴드 양반들 보컬 전범선의 고백은 무척 반가웠다.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여러 이정표 중 하나를 제시해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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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한국사와 독립 운동사에 매료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전범선은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5대조 할아버지가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더 큰 충격은 증조부 이인직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달리 매국의 상징, 이완용의 전문 일본어 통역관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실제로 이인직은 일본 해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한 친일 행위에 적극 동조한 인물이다.

전범선은 뿌리를 뒤흔든 이 거대한 사건을 혼란에 그치지 않고 ‘성찰’이라는 숙제로 풀어냈다. 선조의 부끄러운 치부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안에서 현 시대의 자신이 똑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더듬어갔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밑바닥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최근 책 ‘전범선의 한국사 테라피’를 발간해 그 성찰의 결과물을 담아냈다.

식민 통치, 전쟁, 분단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는 국민이라는 집단은 물론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 크고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전범선의 여정은 말해준다. 우리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오를 똑바로 인지하는 과정도 중요하며 그 과정에는 치유가 필요하다고. 직시와 치유. 하영 일가에 분노하는 우리네 정서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그 이상의 것 가리킨다. 지금 우리에게 딱 필요한 두 가지가 아닌가.

전범선의 서사는 한 가문의 일원이 경험한 사사로움에 끝나지 않고, 공동체로 나아가는 성찰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뜻 깊다. 그의 치유가 어물쩍 화해를 의마하는 것은 아닐게다. 지금 우리가 표출하는 하영 일가에 대한 분노는 상처와 트라우마로 가득하다. 이제는 분노의 근원을 들여다봐야 할 때다.

근원을 제대로 직시하려면 차가운 이성이 필요하다. 무너진 진실을 바로 세우고, 부조리가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인내와 협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그 여정은 매우 지난할 것이다. 수많은 걸림돌이 있을 것이고, 불협화음이 있을 것이며 또 다른 과오도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이다.

하영 일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는 바로 이 여정이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가 더 이상 되물림 되지 않도록. 우리의 분노가 다음 세대에게 전이되지 않기 위하여.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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