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평화롭던 호포항, 어느 날 소가 죽었다. 미상의 존재로부터 공격을 당한 듯 처참하다. 호랑이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실체를 파헤칠수록 기괴하다. 인간의 인지를 훌쩍 벗어난 속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함,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마무시한 공격력까지. 정체불명의 존재가 호포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야,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와 제대로 마주한다. 절망적인 상황 속, 피비린내 나는 호포항에 다시 희망이 떠오를 수 있을까.
15일 개봉되는 영화 ‘호프’(감독 나홍진)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이 동네 청년들로부터 호랑이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온 마을이 비상이 걸린 가운데 믿기 어려운 현실을 만나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제79회 칸 영화제 초청작이다. 나홍진 감독이 영화 ‘곡성’ 이후 꼬박 10년 만에 공개하는 신작으로,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영화는 러닝타임 1시간을 기점으로 변곡점을 맞이한다. 범석이 추적하던 미지의 존재와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특정 시퀀스를 기점으로, 영화는 기존의 스릴러적 문법을 과감히 탈피해 완전히 새로운 장르적 영역으로 도약한다. 나홍진 감독 특유의 쫀쫀한 서스펜스에 익숙해진 관객의 예측을 깨부수듯, 스크린은 순식간에 폭발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다.
이 기점 이후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은 나홍진 감독이 정교하게 설계한 테마파크에서 최고 속도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것과 같다.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극대화된 후반부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체험적 엔터테인먼트를 쏟아내며 관객을 스크린 한가운데로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흥미로운 점은 전반적인 스토리 라인이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눈에 띄게 단순해졌다는 사실이다. 겹겹이 쌓인 복선과 은유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작법과 달리, 이번 작품은 인물들의 직관적인 목표와 생존 본능에 집중한다. 자칫 서사가 헐겁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나홍진 감독은 영리하게도 그 빈자리를 압도적인 동력으로 채워 넣는다.
그 동력의 핵심은 단연 액션신이다. ‘호프’에서 액션신은 단순히 시각적 볼거리를 위한 소모성 장치가 아니라, 서사의 뼈대이자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언어 그 자체다. 적재적소에 정밀하게 타격하듯 배치된 액션 시퀀스들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서사의 개연성을 품고 있다. 관객은 그 액션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서사적 납득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극 후반부 10분에 이르러 미지의 존재들이 가진 숨겨진 서사가 풀리는 대목은 꽤나 도발적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전개 속에서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정보들은 다소 낯설고 어렵게 다가올 여지가 있다. 자칫하면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허무한 결말로 비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구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결말이 결코 억지스럽거나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범석 무리가 목숨을 걸고 부딪혀 온 처절한 사투가 탄탄한 밑그림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몸과 몸이 부딪히고 피땀이 튀는 맹렬한 액션의 궤적들이 이미 관객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열어두었기에, 다소 이질적인 서사마저 영화적 허용 안에서 자연스럽고 충분하게 수용된다.
이러한 폭발적인 영화적 체험을 완성하는 결정적 퍼즐은 조인성이다. 조인성은 미지의 거대한 존재 앞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의 원초적인 나약함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를 단 하나의 시퀀스만으로 완벽하게 설득해 낸다. 미세하게 떨리는 안면 근육은 물론이고, 목덜미에 돋아난 소름마저 철저히 통제하고 연기하는 듯한 그의 디테일은 경탄을 자아낸다.
감정 연기뿐만 아니라 조인성이 직접 소화해 낸 액션 시퀀스들은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후반부 클라이맥스 액션신은 도대체 어떻게 소화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 압도적이다.
더불어 극을 풍성하게 채우는 앙상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초반 1시간을 묵직하고 안정적으로 끌고 간 황정민의 저력과 극적인 환기가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은 정호연의 연기 역시 빛을 발한다. 여기에 모든 일의 원흉이자 괴짜 캐릭터인 양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음문석의 매력도 탁월하다. 이외에도 영화의 배경인 호포항에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완벽한 현실감을 부여한 조연 배우들의 활약 역시 인상적이다.
결론적으로 ‘호프’는 나홍진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가볍게, 동시에 가장 격렬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재고 따질 필요 없이, 놀이기구에 몸을 싣듯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파도에 탑승하면 된다. 극장이 줄 수 있는 모든 시청각적 재미의 극치, 그 순수한 몰입의 순간을 온몸으로 러닝타임 156분 간 체감할 수 있는 ‘호프’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영화 '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