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홈쇼핑과 예능을 넘나드는 방송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굳어진 지금, 뮤지컬 배우 김호영이 또 한 번 예상을 깨는 변신에 나섰다. 늘상 에너지 넘치고 활기찬 그에게도 무대 위에서 새로운 얼굴을 꺼내드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도전이다.
'렘피카'(연출 레이첼 채브킨)는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아르데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과 예술을 무대 위에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여성의 선택과 생존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김호영은 화가 마리네티 역을 맡았다.
"우스갯소리로 사람 이름인지 장기렌터카 이름인지 모를 정도였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김호영은 '렘피카'라는 작품 자체가 낯설었다고 털어놨다. 국내에서 렘피카와 관련한 전시회가 열린 적이 없어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미술계에서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도 작품을 준비하며 알게 됐다고 했다. 인물 정보는 물론 작품 자체에 대한 인지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출발해보니 넘버도 만만치 않았단다. "10년 차 이상 배우들 대부분이 자신이 했던 작품 중 가장 어려운 작품 톱3 안에 든다고 했을 정도"라며 처음부터 난도 높은 도전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털어놨다.
특히 마리네티라는 인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김호영의 첫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음악감독 한정임으로부터 오디션 제안을 받았을 때, 김호영은 유튜브에서 브로드웨이 캐스팅 배우의 강렬한 영상을 보면서 "이걸 왜 나보고 오디션 보라고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외국 크리에이티브 팀이 자신을 그 이미지로 봐줄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오디션 현장에서 그 의심은 단번에 걷혔다. 같은 노래를 세 번 시키는 심사위원들의 의도를 파악해, 세 번째 노래에서는 심사위원석으로 돌진해 물병을 집어 던지며 노래한 것. 김호영은 "나중에 들었는데, 그냥 서 있었으면 무례하게 해보라고 요청하려 했다더라. 내가 알아서 미리 한 거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 그것이 제작진이 김호영에게서 발견한 마리네티의 가능성이었다.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컸던 시기이기도 했다. '킹키부츠', '광화문 연가' 등 기존에 오래 해온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캐릭터를 원했고, 연기적인 부분에서 특히 새로움을 갈구하던 때였다고 했다. 여기에 절친 차지연, 정선아, 최정원 등이 함께한다는 사실도 출연을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김호영은 "정선아와는 2012년 이후 14년 만이고, 차지연과는 같은 무대에 선 경험이 거의 없었다. 각자의 템포에 맞게 성장한 상태에서 다시 만나면 좋은 시너지가 나겠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재밌겠다는 마음이 컸다"라고 말했다.
극 중 마리네티는 시종일관 분노에 차 있는 인물이다. 김호영은 "처음에는 그저 성격이라고만 받아들였지만, 파고들수록 인물의 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라며 "세계대전을 겪으며 친구와 가족을 잃은 사람이다.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인물이고, 그 강함이 기계와 속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것 같다"라고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복잡하게 접근하기보다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해 인물의 극단성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요즘 말로 하면 '츤데레'적인 면도 있는 인물이라는 해석도 더했다. "쟤 미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는 인물이어야 극단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광기와 드라마적 반전을 동시에 품은 인물로 마리네티를 그려냈다고 말했다.
마리네티의 음역대가 자신보다 낮아 기술적인 면에서 부담은 있었다. 김호영은 연출진에게 "소리를 원활하게 못 내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무대에서는 결국 만들어낼 것"이라고 먼저 말했고, 작곡가는 "노래로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마리네티가 될 것 같다"며 이른바 '파괴권'을 건넸다. 그 한마디가 김호영을 깨웠다. 지난 25년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목소리와 캐릭터를 꺼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실제로 수용소장 등장 장면에서는 지인들 또한 첫 30초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만들어냈고, 어머니조차 "태는 우리 아들인데 목소리가 아들이 아니네"라고 할 정도였단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김호영은 2016년 '킹키부츠'의 찰리를 처음 맡았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모두가 그가 찰리를 연기할 수 있을지 의심했지만, 김호영은 '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믿었다고 털어놨다. 마리네티도 마찬가지였다고. "남들에게 내 이미지가 너무 굳어져 있던 것"이라며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어렵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있지만, 그것이 변신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라고 강단있게 말했다. 다만 오히려 요즘은 자신을 알아보는 관객이 늘어난 만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다른 결의 부담감이 생겼다고도 털어놨다. 그럼에도 결론은 하나라고. "어려워야 재밌지. 재밌는 거다, 변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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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렘피카, 김호영 |
2002년 '렌트'의 엔젤로 시작해 '모차르트!'의 모차르트, '아이다'의 메렙, 그리고 '킹키부츠'까지. 김호영의 25년 연기 인생에는 수많은 '인생 캐릭터'가 자리 잡고 있다. 김호영은 마리네티 또한 그 반열에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킹키부츠' 쫑파티에서 스태프 분이 끼와 재능이 넘쳐서 무대에서 잘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렘피카'를 보면서 '극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하더라. 생각지도 않은 단어여서 뭉클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라는 말을 보태며, '렘피카를 향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뮤지컬 외길에 대한 고집이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김호영은 홈쇼핑 출연, 유튜브 등의 대회 활동에 대해 "재밌어서 하는 거다. 무대 위에서 뭔가를 만들어갈 때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라고 말했다. 예능과 홈쇼핑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간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배우로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늘 의식하고 있다고도 짚었다. 언젠가 매체를 통해 새로운 면을 보여줄 기회가 오길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김호영은 "최근에 '꿈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다'라는 말을 후배들에게 건넨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지금의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온다며, 어디서 어떻게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인지만 하고 있다면 찾아온 기회를 재빠르게 잡을 수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자신의 강점을 정확히 알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배우, 참 영리한 배우 김호영의 행보에 기대를 품어본다. 그가 출연하는 '렘피카'는 오는 21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공연한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놀유니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