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놓지 않은 '렘피카'처럼, 무대 위에서 오롯이 특별한 김선영 [인터뷰]
2026. 06.06(토) 09:00
뮤지컬 렘피카, 김선영
뮤지컬 렘피카, 김선영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김선영은 뮤지컬 '렘피카'를 주인공인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공연이 끝나기 전에 인물을 완성할 수 있을지, 끝까지 가봐야 알 것 같다는 고백에는 인물을 완벽하게 조각하고 깎아내려는 치열한 장인 정신이 담겨 있었다.

'렘피카'(연출 레이첼 채브킨)는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아르데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과 예술을 무대 위에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여성의 선택과 생존을 입체적으로 담아내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김선영은 주인공인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았다.

타마라라는 인물을 한 마디로 규정해 달라는 질문에 김선영은 "복잡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분명한 예술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순수한 예술을 향한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물. 그림을 그리고 팔며 자신을 이미지화하고 브랜드화했던 방식이 단순히 예술을 추구하는 화가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전략적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장면장면 변해가는 그 모습, 그것이 김선영이 느끼는 타마라라고 했다. 복잡한 인물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설득해낼 것인가. 그 질문이 이 작품을 대하는 김선영의 출발점이자 여전히 진행 중인 숙제다.

실존 인물인 타마라를 연기하기 위해 김선영은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그림을 찾아보고, 대본과 음악을 맞춰가며 이 인물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고민했단다. "원체 독특한 인물이고,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도 유명 화가로 폭넓게 알려진 이름은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실존 인물이기에 자료 조사는 필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료를 넘어서는 무언가, 즉 타마라의 내면을 납득하는 것이 먼저였다.

'렘피카'는 애써 타마라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사랑, 행동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어지러운 시대 속 생존을 갈망하던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때문에 자칫 타마라가 생존을 위해 달려가는 욕망과 야망의 인물로만 읽힐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고, 김선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과제였다고 그는 "연기하는 배우가 캐릭터의 행동을 스스로 먼저 납득해야 관객 앞에서도 설득력 있는 연기를 펼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최대한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를 고민하며 인물을 그려내려 했다. 지금도 납득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들을 찾아가고 있다"라고 털어놨다.

김선영은 "러시아 혁명으로 파리에 망명한 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 몰락한 삶 속에서 렘피카는 붓을 들었다. 귀족 출신의 남편이 "냄새나는 돈을 왜 세야 하느냐"고 말할 때, 직접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며 "일단 정말 단순하게 먹고 살아야 하니까,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해서 그림을 그렸고, 하나 팔리면 몇 달치 생활비가 나오는 상황을 상상하며 출발했다"라며 타마라에 대해 설명했다. 성공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결국 가족을 위한 타마라만의 생존 방식이었다는 항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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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 김선영

타마라와 그의 뮤즈 라파엘라와의 관계 역시 단순한 동성애적 욕망으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다만, 김선영은 "처음에는 동성애 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우려도 있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만의 철저한 해석이 없다면 타마라가 단순히 여자가 여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장면으로 흘러버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라며 "타마라는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라파엘라를 봤을 때 단순히 여성에 대한 욕망만 느꼈을지 의문이 들었다"라고 짚었다.

"저는 타마라와 라파엘라의 만남이 단순히 동성애가 깨어나는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예술을 향한 갈망 같은 것이 라파엘라를 통해 깨어나고, 그게 돈과 유명세로 연결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죠. 이런 해석을 연출님과 충분히 논의했고, 복잡한 해석,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이 장면에 임해야만 관객들에게도 '쟤는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대 위에서 계속 연기하다 보니 이제 이 장면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은 없어졌죠."

세 명의 라파엘라, 차지연, 손승연, 린아와 함께하는 무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보여지는 이미지도, 창법도, 연기 톤도 모두 다른 세 사람이다. 김선영은 "최대한 받는 입장에서 거기에 묻혀지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타마라가 극을 이끌고 가는 인물이지만, 장면 안에서는 함께 있는 사람들과 섞여가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날 그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매력이 순간 순간 느껴진다"라는 말에서 매 공연 새롭게 무대를 만들어가는 배우의 감각이 묻어났다.

김선영은 '렘피카'가 관객에게 답을 주는 작품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토록 화려하게 살던 타마라가 노파의 모습으로, 피날레 직전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것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김선영은 "사람들은 늘 어떠한 순간에 어떠한 선택을 한다. 그 이후에는 자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 한다"라며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타마라에게 투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꼭 교훈을 얻어가기 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공감하는 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선영은 화려한 그림을 남기고 드라마틱하게 살다 간 시대의 아이콘, 타마라에게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봤다고 말했다. "나는 타마라처럼 유명하지도, 대단한 배우도 아니지만, 평범한 김선영이라는 사람이 무대에 서고 인물을 연기할 때만 조금 특별해진다는 생각을 한다"라며 "평범한 사람이 특별함을 보여준다면 그게 비범함이 되는 거니까, 그걸 타마라에게서 봤고 표현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지금껏 자신을 무대 위에 세워왔다고, 그것이 타마라를 살아가게 한 힘과 닮아 있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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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 김선영

배우들에게는 출연한 모든 작품이 소중하기 마련이지만, 김선영은 이번 '렘피카'에 유독 개인적인 의미도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집에서 크게 넘어져 팔꿈치 골절 부상을 당해 응급수술과 통깁스를 거쳐 재활 훈련을 이어가며 겨우 무대에 올랐기 때문. 김선영은 "넘어지는 순간,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며 내가 이대로 끝이 나나 싶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재활이었지만, 이 작품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재활도 더 더뎠을 것 같다"라고 말하며 작품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뮤지컬 계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수많은 대작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던 김선영, 50대 초반의 나이로 타마라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정말 죄송하게도 후배들에게 기회를 줬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한다"면서도 "할 수 있는 만큼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타마라 역 배우들이 모두 40대인 것을 보며 자신이 거쳐온 길을 후배들이 지나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다. 마지막 공연의 피날레에서 오로지 자신만 느낄 수 있는 승리감을 맛보기 위해, 김선영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무대에 서고 있다. 타마라가 캔버스 앞에서 붓을 놓지 않았듯, 무대를 떠나지 않는 김선영의 모습이 두 사람의 가장 닮은 지점처럼 보였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PL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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