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거대한 자본이 영상으로 구현해 낸 한민족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아이러니하지만 글로벌 OTT 애플TV+의 두 번째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첫 장면의 자막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며, 8회 내내 섬세한 시선으로 생존한 한국인들의 역사를 훑어 내리는 이 작품의 성공을 어찌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25일 공개된 '파친코'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던 재미 작가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며 시대적 비극에 휩쓸린 한 자이니치(재일동포) 집안의 서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또한 금지된 사랑에서 시작해 전쟁과 평화, 사랑과 이별, 또 승리와 심판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를 그린다. 한·미·일 합작 프로젝트로 진행돼 애플TV+가 제작에 나섰다.
주인공 선자(김민하)는 1915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소녀다. 장애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딸을 아끼는 아버지, 생활력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선자는 일본에서 온 자수성가한 사업가 한수(이민호)를 만나고 불 같은 사랑을 나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선자는 우여곡절 끝에 가족을 두고 일본으로 떠난다. 끝없는 생존 게임의 시작이다.
드라마는 선자의 연대기를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 시절인 1910년대, 한수를 처음 만난 소녀였던 1930년대, 그리고 백발의 노년 선자(윤여정)와 손자 솔로몬 백(진하)이 등장하는 1980년대로 타임라인을 쪼개 쉼 없이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배경 또한 파친코 기계 속 강철 볼처럼 부산, 일본 오사카와 도쿄, 미국 뉴욕으로 쉴 새 없이 튄다.
그럼에도 선조들과 후손들의 이야기는 씨실 날실처럼 조밀하게 짜여 멋진 직물이 되고, 그 위에는 각자도생 끝에 힘겹게 삶을 지켜낸 민초들의 100년 생존기가 새겨진다. 특히 한 회씩 껍질을 벗겨낼수록 단단하게 응축된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일본의 쌀 수탈, 강제징용, 위안부, 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등이 배경 서사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또한 일본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한국인으로 남은 자이니치들의 자부심, 이들을 향한 세상의 은근한 차별도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주제를 관통한다. 폭력을 전면에 드러내거나 신파를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삶이 황폐해진 모습을 조명해 전쟁의 비극을 충분히 보여주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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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TV+ 파친코, 윤여정 김민하 이민호 |
여기에 배우들의 열연이 완성도를 담보했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출연에 전 세계가 주목했으며 한류스타 이민호의 등장에 팬덤이 술렁였지만, 기존의 명성을 떼어 놓고 봐도 이들의 연기는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윤여정은 실향민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살아온 어머니 세대의 모습을 초연하게 그려냈다. 이민호는 생존을 위해 악행도 저지르는 한수를 연기하며 기존의 '백마 탄 왕자' 이미지를 벗고 한층 본능적인 연기를 펼친다.
또한 새로운 얼굴들의 활약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소녀 선자를 연기한 신예 김민하의 등장은 실로 놀랍다. 주근깨를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에는 순진한 소녀의 표정과 강단 있는 눈빛이 뒤섞여 있으며, 이 얼굴이 첫사랑의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일어나는 변화는 보는 이들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선자의 어머니 양진 역을 맡은 정인지는 내공 있는 연기로 서사에 힘을 더하며, 재미 교포인 진하는 미국 명문대를 졸업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차별의 벽에 부딪혀 방황하는 자이니치 3세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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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TV+ 파친코, 김민하 |
섬세한 역사 고증, 아름다운 영상미도 한몫을 한다. 한국계 미국인들이 다수 포함된 제작진은 원작 소설의 정서를 살리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또한 애플의 거대한 자본이 쏟아 부어진 배경 미술은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상케 한다. "매일 부산 영도 시장 세트를 만들기 위해 2톤 화물 트럭 분량의 해산물을 공수하는 자본력에 놀랐다"는 이민호의 말처럼 1910년대 부산, 1930년대 오사카, 1980년대 도쿄와 뉴욕의 모습이 구현된 세트 곳곳에 정교한 현실감이 묻어난다.
'파친코'는 공개 전부터 해외 평단의 호평 세례를 받으며 기대작으로 떠올랐다. 완성도만 놓고 보자면 애플TV+ 입장에서는 이미 잭팟이 터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소위 '터지기를' 응원한다고 적은 이유는 '파친코'가 글로벌 OTT의 영향력에 제대로 편승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는 '오징어게임'의 뜨거운 인기를 통해 국경의 벽을 허무는 OTT의 힘을, 웰메이드 콘텐츠의 힘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애플TV+를 타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세계인들에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알려질 수 있다면 그보다 짜릿한 드라마가 또 있을까. 부디 이 작품이 흥행해 빠른 시일 내에 다음 시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애플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