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모든 나라가 그러하겠지만, 우리에게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 일명 ‘민족의 얼’을 지키고 알리는 일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26년간 타국의 폭력에 나라를 잃은 경험이 남긴 깊은 상흔은, 나라를 되찾아 어엿한 자주국이 되었다 해서 사라질 수 없다. 단순히 물건이 자리를 옮기듯 주권이 다른 곳으로 갔다 되돌아온 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수십년 동안 유린을 당한 기억을 안고 되돌아온 것인 까닭이다.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언뜻 부피가 크게 느껴지고 추상적이어서, 그 중요성이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하나의 예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가 조선을 떠올릴 때 으레 당파 싸움만 하다 외세에 잡아먹힌 흐름으로 인식하곤 하는데 사실 이 사고방식(‘한국인은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은 일본 침략주의자들에 의해 심어진 것이다.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왜곡한, 교묘하고 악의적인 전략이다. 문제는 놀랍게도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우리로 하여금 종종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그로부터 비롯될 개인의 자존감에 자발적으로 색안경을 끼게 한다는 데 있다. 즉, 자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배우며 바로 세우는 일은 현재에 놓인 우리의 삶과 실질적인 연관을 지니는 것으로, 이것과 관련된 논란에 있어서 더욱 민감하고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는 이유다.
역사 왜곡으로 동북공정(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겠다는 목적 아래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연구 프로젝트) 드라마란 오명을 쓴 SBS ‘조선구마사’(연출 신경수, 극본 박계옥)가 결국 방영 2회 만에 폐지 수순을 밟았다. 조선을 배경으로 중국식 소품들을 무분별하게 등장시킨 것도 모자라 역사 속 실존인물이자 조선 왕조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태종을, 실제 역사와 거리가 먼 악의적인 설정으로 묘사하며 대중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작가와 연출진, 제작사의 역사의식이 충분히 의심될 만한 상황. 더 놀라운 것은 ‘조선구마사’의 작가나 제작사 모두 이런 논란이 처음은 아니란 점이다. 해당 제작사는 앞서 드라마 ‘빈센조’에서 중국의 한 기업이 내수용으로 만든, 표기까지 중국어로 되어 있는 비빔밥을 그대로 노출시켜, 안그래도 신 동북공정이 아니냐 할 정도로 김치, 한복 등을 두고 자신의 것이라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국에 힘을 보탠 꼴이 되고 말아, 한 차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유치되는 자본 중 중국의 지분이 커지는 바람에 발생한 실수라고는 하나, 국내 유수의 작품들을 제작하고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거대 제작사가, 이익창출이 중요하다 해도 이 정도의 가치 판단도 하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가는 중인 우리에게 역사가 어떤 의미인 줄 안다면 당연히 좀 더 섬세히 다루어야 했으나, 그러기는커녕 동일한 맥락의 문제를 또 일으키고 말았으니 이제 와 드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게 아닌가.
작가 쪽은 더욱 심각하다. 전작인 ‘철인왕후’는 중국에서 ‘혐한’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원작이어서 방영 전부터 말이 많았고 극 중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을 ‘찌라시’라 표현하는 등의 잘못을 범하며 대중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래도 연기력 좋은 배우들의 힘을 입어 어찌어찌 잘 넘어 갔나 싶더니 결국 ‘조선구마사’에서 본인의 역사의식의 진면모를 드러내며, 도입부도 채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폐지가 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역사와 관련해선 유독 예민해야 한다. 우리의 자긍심 및 자부심과 직결되는 것임에도 지키지 못한 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를 기반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파는 이들은 조금의 왜곡도 있을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 날을 세워야 할 터. 더구나 오늘날 해외에서 한국 콘텐츠가 가지는 파급력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함을 상기할 때 ‘조선구마사’와 같은 작품들이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를 통해 퍼져나갔을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사진 = SBS '조선구마사', tvN '철인왕후', '빈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