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런 준비 없이, 허망하게 잃는 일이 실어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혹자는 시간이 약이라고도 하지만, 채 해결되지 않은 상실의 고통은 수이 사그라들 리 없으며 오히려 터져 나갈 적당한 시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직면하며 그것이 건네는 슬픔을 오롯이 끌어안는, ‘애도’의 과정은 너무도 중요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하루 아침에 인류 절반을 잃은 지구에서 히어로 중 하나인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가 한 일은 치유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했다는 동일한 고통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잃은 이를 이야기하고 나누며 기리는 과정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러한 시간이 없이는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특히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경우, 그 위험성은 한층 더 짙어진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 등장하는 ‘그’는 급작스런 애인의 자살을 겪은 후 코끼리가 가슴을 짓밟는 것만 같은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한다. 사랑한다면서 그녀의 아픔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통증이었다.
“그와 그녀도 아예 처음부터 서로 오해한다고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해한다고, 서로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니.” 그의 아픔을 더욱 악화시킨 요소는, 그가 그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자신도 그녀처럼 ‘자기 안에서, 혼자’ 죽게 될까,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할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준비는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 것도 고통스러운데, 그런 까닭에 한층 증폭된 죄책감은 압도적인 크기로 덮쳐 온다. 이러한 상황에 애도(哀悼)의 시간을 제대로 보냈을 리 없고, 부피가 클수록 온전히 다루어져야 하는 슬픔이 방치 되었으니 이들의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건 당연지사.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슬픔을 가슴 한 쪽에 끌어안은 채 그저 살아나갈 따름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실의 순간과 그로부터 비롯된 슬픈 절망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일이다. 온전한 애도를 해내는 일이다. 물론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지닌 이들과 ‘함께’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서 피어나는 이해의 노력이란 상당히 절박하여, 여전히 쉽지 않을진 몰라도 그렇게 어려울 일도 아니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샤이니’가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어온 멤버가 죽음을 결정할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고통에서 다행히 건강하게 헤어나와, 고인을 향한 여전한 사랑과 그리움을 사람들 앞에서 담담히 내뱉을 수 있는 이유 또한 동일한 맥락에 위치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멤버의 빈 자리에 놓인 상실감과 자책, 무력감을 서로 나누고 보듬어주며, 온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과정을 겪어냈기에 취할 수 있는 모습이니까.
“피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 애도의 감정은 피할수록 비대해지고 비대해져서 남은 이들의 영혼을 더욱 무겁게 짓누를 뿐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행위는 그만큼 살기를 열망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 살아 남아 있는 이들은 먼저 떠난 이가 남긴 따뜻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듬어 가며, ‘키’가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말처럼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리워하면서, 더욱 살아 남는데 골몰해야 할 것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사진 = MBC '나 혼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