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의욕 가득한 야심가일 리 없다. 어떤 사람에겐 경쟁의 레일에 오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혹은 투쟁심이 없거나 몹시 내성적인 경우도 있다. 이런 류의 정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은 스펙터클하고 근사해질 가망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살고 싶지 않다’의 동의어가 반드시 ‘죽고 싶다’는 아닌 것처럼 나는 대개의 순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고요하게 흘러가고 싶다. 요즘엔 지나가버린 젊은 날을 헛헛해 할 부모 세대와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취급에 시달릴 소외층 노인들을 생각한다. 태극기 부대와 집회를 형성하는 무리들, 가령 1호선 지하철 할아버지가 대학생 커플 옷매무새에 불호령을 칠 때면 ‘릴렉스(relax)하소서’를 되뇌는 호젓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이 듦이란 결국, 나와 다른 고통에 놓인 동시대 사람들을 의연하게 수긍하게 되는 과정일 테다.
KBS2 예능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출연진 박원숙, 혜은이, 문숙, 김영란 평균 나이는 66세다. 네 사람 모두 이혼 과거가 있다. 자식을 낳으면서 전남편과의 애증에 시달렸고 연예계 활동 중엔 사생활 루머, 채무 구설에 휘말렸다. 박원숙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박원숙은 가족상을 치르던 당일에도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콜라텍 댄스 장면을 소화해냈다.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프로페셔널의 인내다.
한국에서 중노년의 삶은 어쩐지 단출해야만 할 것 같다. 최근 기업과 기관들은 세련된 실버모델을 캐치프레이즈화 했으나 그건 피지컬과 재력을 타고난 1~2% 노년의 이야기다. 대다수 노인은 젊은 세대를 향한 정신적 양보를 강요받고 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어른다운 성인(聖人)이 존재하긴 할까. 현실은 70~80대 영감이 노인정에서 만난 이웃 할머니와 정분이 나곤 하는 범속한 사례가 더 빈번할 것이다. 2015년 경북 상주 공성면에 거주한 박 모씨(87)는 평소 미워했던 마을 주민들의 사이다 컵에 농약을 탄 혐의로 이듬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노인의 욕망도 청춘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면 혀의 미뢰 개수가 줄어들긴 한다. 음식을 맛보는 쾌감조차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신의 욕망은, 경험치가 다양한 만큼 젊은 시절보다 도리어 형형할 수 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청춘을 바친 한국의 전업주부 어머니들은 사회적 이름마저 잃어버렸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자기 삶의 무게를 유의미하게 책정해 볼 수 있을까.
2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60대 여성의 현재를 그린 영화 ‘69세’(감독 임선애·제작 기린제작사)는 최근 관객 평점에서 남성들에게 별점 테러를 당했다. 황혼 여성의 심리적 우울에 20대 남자의 미래를 비견할 바 아니라는 사회 보편 원칙에 기인해서다. 실제로 법조계 전문가들은 “한국의 판사들은 튀는 판결문을 스스로 꺼려한다”고 증언한다. 가령 수 년 전 재판부는 원고 여성이 피고 남성에게 감자탕을 담아준 것을 보면 성관계도 승낙한 것 아니냐는 남성중심적 판례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노년, 청년, 아동, 여성, 남성, 미혼, 기혼들이 선 오늘의 운동장이 어쩌면 누구에게도 평평하지 않으리라는 전조다.
영화는 이 같은 한국사회의 공공연한 인권 침해 경향을 조용하지만 단호한 미장센으로 허물어낸다. 비바람 아닌 햇살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법일까. ‘69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햇살처럼 고지하는 인권기록의 한 페이지다.
인류사회의 품위는 GDP, 경제성장률 뿐만 아닌 노인 예우론에서 비롯된다. 33년간의 경쟁 체제 데미지를 입으며 대기업 임원을 지낸 내 아버지(64)는 퇴직 이래 번뇌가 급증하는 기세로 온 가족을 은은하게 걱정시키고 있다. 비단 늙은 사람들에게 냉혹한 세상의 애티튜드를 탓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부모 본질을 가늠해보지 않았던 무심한 딸이지만 세상의 운동장이 누구에게나 균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꾸준히 의식하기로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란 불가능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녹슬어가는 세계의 어른들을 볼 때마다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에 이르곤 한다. 쓸쓸하지만 부단히.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KBS, 포스터,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