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한 구절이다. 허망하게 소중한 존재를 잃은 이들은 상실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상실할 당시의 기억을 안고 슬픔으로도 채우기 힘든 부재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tvN ‘하이바이, 마마!’(연출 유제원, 극본 권혜주)는 급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사건으로 가족의 곁을 떠나게 된 차유리(김태희)가 5년이 지난 후 불가사의한 의지에 의해 49일간 되살아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온전한 육체와 삶을 되찾은 건 아니다. 조건부의 시간으로, 49일 내에 제 자리, 즉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살아생전의 자리를 되찾아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
“난 포기가 아니었어, 인정이었어, 내 삶이 끝났다는 거, 5년동안 인정했을 뿐이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남편의 옆엔 새로운 아내가, 딸의 옆엔 새로운 엄마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 하지만 유리는 죽고 5년동안 남편과 딸, 사랑하는 이들 곁에 소리 없이, 형체 없이 있으며 터득한, 설사 살아 있는 몸을 얻었다 하더라도 ‘차유리’로서의 삶은 이미 끝이 나 있다는 생의 진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우리가 여태 보아온, 한도 미련도 많아 이생을 떠돈다는 귀신의 전형을 단번에 깨는 존재라 할까.
이쯤에서 문득 고개를 드는 의문, 그렇다면 그녀는 왜 살아 돌아왔는가. 아니, 살아 돌아와야 했는가. 물론 이야기상으로는 설명이 되어 있다. 죽은 딸을 딱 한번만 보고 싶다는 유리 모친의 간절한 소원이 응답된 것.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짚어내고자 하는 바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 다시 말해 죽은 사람을 굳이 되살리면서까지 만들어진 드라마 ‘하이바이, 마마!’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다.
“그것도 네 복이다, 인사 다 하고 죽는 사람 몇 없는데”
죽음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유리가 한 일은 다시 만난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주 성실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작업이었다. 그녀의 사람들이 아무런 대비 없이 맞닥뜨려야 했던 그녀의 죽음은 그들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기고 무력한 슬픔으로 내몰았다. 유리의 남편은 의사임에도 그녀의 죽음의 흔적이 남겨진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했고 엄마는 딸의 흔적이 사라질까 방을 딸이 살았던 시간들로 가득 채웠다.
그렇다. ’하이바이, 마마!’는 그 어떤 애도의 과정도 밟지 못한 채 슬픔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유리를 다시 살려 보냈다. 잘 보내주고 보내줌을 받으라고, 현실에선 불가능하나 드라마에선 가능한, 아주 특별한 애도의 시간을 서로를 위해 갖도록 마련해준 것이다. 또다시 찾아올 이별의 고통 때문에 차라리 살려 보내지 말지 그랬냐 되묻던 유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49일의 시간을 상이나 벌이 아닌,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애도의 전 과정을 올바르게 밟았다 해서 상실의 기억이 없던 것이 되지도 멈춰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세계를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게 될 뿐이다. 드라마 밖에 선, 어쩌면 각각의 상실의 세계에 거하며 애도의 시간을 구하고 있었을 지 모를 우리에게, ‘하이바이, 마마!’가 드라마로서 건넬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위로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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