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고지에 있다. JTBC 개국 시초 중상류층의 선민의식을 저격했던 김희애 주연의 ‘아내의 자격’ ‘밀회’는 또 다른 결의 극사실주의 드라마 계보를 만들어냈다.
매 회 뜨거운 화제성과 높은 시청률을 경신하는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극본 주현·연출 모완일)가 시청자들의 말초신경마저 자극하는 파토스(pathos, 전율) 전법으로 무장했다. 드라마는 삶의 냉혹한 단면을 극대화한 영국 BBC 원작 ‘닥터 포스트’의 센 묘사 수위와 스토리라인을 고수하되, 모안일 PD의 연출 공력에 힘입어 한국 특정 계층의 고착화된 습관이나 정서를 장면 곳곳에 집요하게 배합해낸다.
지성, 재력, 능력, 인성을 고루 갖춘 가정의학과 전문의 지선우(김희애)는 삶의 필수요건 중 유달리 인복이 없는 여자다. 시작부터 주변인들은 허울 좋은 친분관계 미명 아래, 지선우의 안락한 환경과 성공을 은근히 시기하는 사람들로 요약됐다. 여기에 시청률 제조기인 한국형 불륜 소재가 정밀 묘사돼 화력을 더했다. 가령 지선우 곁에서 자상함을 연기하는 최측근 남편 이태오(박해준)는 사실상 아내의 승승장구를 견디지 못하는 표리부동 인물의 전형이다.
한국 중산층의 후천적 심리드라마
‘부부의 세계’ 1회는 마치 팝아트의 어떤 장면처럼 이태오가 주방에서 씻지 않은 손으로 집어든 갈비 덩어리, 다이닝 가구 곳곳에 튄 고기 국물을 모던한 카메라줌으로 부각했다. 정갈하게 단련해온 지선우의 품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는 존재, 이는 말 그대로 모든 이들의 인생에 들이닥치곤 하는 ‘훼방꾼’의 적시였다.
발단부에서 화이트 톤 의상을 착장한 배우 김희애 패션 역시 위 장면을 기점으로 일괄 무채색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제쳐야만 계급 상승 가능성이 있는 고속 성장형 한국사회에서 주변인의 불행은 곧 그들 자신의 음험한 기회일 수 있다. 이태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불륜 심리를 알면서도 내심 지선우의 균열을 기다리는 동료 여의사 설명숙(채국희), 태생적인 정복욕 탓에 지선우를 변태적으로 관음해 온 손제혁(김영민), 쇼윈도 부부관계의 울분을 삐뚤어진 방향으로 투영하는 손제혁 아내 고예림(박선영), 각자의 뒤틀린 개인사로 말미암아 이들 모두가 지선우의 조용한 불행을 바라마지 않는다.
‘부부의 세계’는 여전히 ‘밀회’ ‘아내의 자격’, 혹은 ‘스카이 캐슬’의 계보를 잇는 극사실주의적인 인간 군상 고발극에 가깝다. 충분히 가진 것들을 공기처럼 누리며 지금보다 더 아래 계급으로 떨어지는 일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 자본주의 한국의 허리를 담당해 온 중산층의 이 같은 선민의식은 수순처럼 시기질투라는 인간 본능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사람들 기저에 도사린 이 같은 은밀한 감정을 각각의 캐릭터 행동 모티프에 교접하며, 지선우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불안을 때론 작중 인물의 환시마냥 때론 시간 역행 기법을 통해 나열한다. 그래서 지선우의 불안은 유년기 부모의 죽음을 목도한 스트레스 외상성 장애일뿐 아니라, 한 발 나아가 개인의 불행을 구조 문제로 떠안으려는 ‘부부의 세계’의 사회 시의적 고려로도 다가설 만하다.
부당한 여자의 일생
유사한 맥락에서 ‘부부의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사회의 틀에 갇힌 채 살아온 A, B, C, D, E 여성들을 서늘하게 관찰하는 드라마다. 자수성가해 능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최상위 포식자 지선우조차 가혹한 불륜의 피해자로 전락하는 설정, 그렇다면 대부분의 그렇지 않은 기혼 여성들이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는 굴욕은 핍진한 현실세계의 전제가 된다.
남편 친구의 유흥업소 취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엄효정(김선경)이나, 몸매 관리에 힘쓰던 중 유부남에게 걸려든 딸 여다경(한소희)이 각기 삶을 운용해온 가치관이 별반 다를 리 없다. 자연스레 다경은 불륜관계의 가학성조차 깨닫지 못한 채 이태오에게 육체적 농락을 당하며 악순환의 상징 같은 사생아를 밴다. 더군다나 남자친구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폭행을 당하면서도 “나밖에 이 사람을 사랑해 줄 수 없다”고 항변하는 민현서(심은우)는 숱한 남성들의 반복적인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사리분별력마저 잃은 피해 여성들의 심리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2020년 드라마 속 여성들의 불합리는 더 이상 브라운관의 단말마적 분노를 노리는 극화 요소만은 아니다. 성을 착취해 이를 뭇 남성들에게 공유하며 수 십 억 수익을 낸 ‘텔레그램 n번방 사태’가 남성 포주 ‘사업’ 일환으로 간주되고, 최근 강남 한 유흥업소 여성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으로 말미암아 질병관리본부는 해당 업소에 동시다발적으로 드나든 500여 명의 이름 모를 남성 고객을 축출해야 한다.
정신의학과에 따르면 일부 의료 관계자들 사이에서 강남 상권은 성형외과, 뷰티숍, 정신과 진료, 백화점 명품숍, 클럽, 요식업 등을 주기적으로 이용하는 유흥업소 여성들의 큰 지출로 운용된다는 것이 공공연한 통설이다. 남성들이 윤락업계의 성을 구매하는데 득의양양하게 지갑을 열고, 때문에 윤락업소가 재난 상황에 노출되면 한국 최고의 값비싼 상권부터 내려앉을 수 있다는 요지다.
‘부부의 세계’는 공교롭게도 이 같은 남성중심주의를 오래 고집해온 한국 풍속의 여러 민낯을 까발린다. 원작 ‘닥터 포스트’가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동시다발적인 몰락 과정을 서커스 곡예처럼 관전하는 구도였다면 한국판은 남편에게 때 아닌 불륜 봉변을 당한 지선우의 고통에 잠식된 내면을 부각시키며, 인과관계를 추리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편이다. 때문에 지금껏 자기 삶의 궤적의 문제점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작중 여성 인물들의 자기 기만적일 만큼 수동적인 일상은, 전 연령층 시청자의 가슴에 작지 않은 교조적 메시지와 상흔을 남길 법하다. 비로소 여자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시작했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