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1986년부터 91년까지 총 10명의 부녀자가 살해당해 경기도 화성시 곳곳에 유기됐다. 2019년, 사건 발생 30년이 넘도록 미해결로 남아 있던 이 장기미제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처제 성폭행·살해로 교도소 수감 중인 이춘재(57)의 DB(데이터베이스) 내 DNA와 당시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가 일치한 탓이다.
이 최악의 사건이 국내에서 장기간 현실적으로 환기될 수 있었던 것은 일련의 콘텐츠 영향력이 지대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제재로 한 최초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사건일지를 좇으며 전 국민들에게 사회범죄의 심각성을 확증해냈다. 당시 시나리오를 1년 간 공들여 완성한 봉준호 감독은 누구보다 치열한 자기해부 과정을 거쳤다. 그는 “범인을 만나는 것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했고 범인을 만나면 던질 질문 리스트도 가지고 다녔다”면서 영화가 완성될 쯤엔 자신이 범인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상상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는 르포형식의 리얼리티에 총 역량을 할애하기보다 문학적 대사의 삽입, 터널·숲·비(雨)의 어둔 미장셴을 활용해 극화된 스토리로서의 전율을 꾀한다. 이 같은 예술적 상상력과 사회 풍경의 효율적 결탁은 거짓·살해·사기·절도 등 세상의 모든 범죄적 악(惡), 선악을 교묘하게 내재한 다양한 군상, 일상 속 사람들의 빈번한 심리전을 생생하게 클로즈업해냈다.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예지력을 차치하고라도 ‘살인의 추억’은 인간 심연과 진실에 관한 섬세한 사회심리생태보고서로 기록됐다.
현 시각 지상파 방송사들도 화성연쇄살인 이슈를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SBS는 수차례의 보도자료에서 간판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그간 쌓아온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이춘재를 용의자로 특정한 첨단 DNA 기법을 쫓는다고 공표했다. 관건은 이춘재의 혐의가 현 과학수사 체제 아래 어떤 식으로 입증될 수 있는지, 이로써 향후 범죄사건 방지·해결에 이번 사례가 미치게 될 순기능 유무다.
MBC의 경우 지난 25일 ‘실화탐사대’를 통해 이춘재 개인의 뒷이야기를 빠르게 브리핑했다. 우선 제작진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 졸업사진을 공개했다. 이춘재의 처제 성폭행·살해 전말은 당시 인근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구성됐으며 그를 알고 지낸 고향 지인들이 수 십 년 전 그의 성향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이춘재 친모를 찾아가 그의 감정을 자극하며 사견을 독촉했다. 친모는 본능적으로 이춘재를 감싸며 아들이 처제를 살해한 것은 “전처가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저지른 우발 범죄였다고 주장한다.
공영방송의 이 같은 선정적 분량 구성은 시청률을 위한 일종의 확증편향에 가깝다. 모든 범죄사건에는 피해자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 사회 제반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3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 엄연히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가족들이 지난 아픔을 반추하는 이 시점, 그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수정 범죄심리학자는 다수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사법정책의 목표 중 하나는 피해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유가족들에게 본인의 가족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구성원 전체가 30년 간 뿌리 내린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절호의 기회와 대면했다. 공소시효와 별개로 모든 범죄사건의 진범 특정이 필수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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