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정선 가리왕산, 엄순분 할머니가 농사 짓는 이유
2018. 11.12(월) 07:58
인간극장
인간극장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인간극장'에서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에 사는 엄순분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12일 오전 방송된 KBS1 교양프로그램 '인간극장'은 '엄순분의 봄날' 1부로 꾸며졌다.

온 산이 붉게 물드는,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 농부들에게는 일 년 농사의 성적표를 받는 수확의 철이다.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 자락에 놓인 외딴집, 이병한(78), 엄순분(75) 내외도 이 밭 저 밭을 다니며 가을걷이를 하느라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고 종류대로 심은 곡식들, 하나 둘 거두어서 하우스를 채우는 중인데, 웬걸 채우기가 무섭게 비어버린다. 대처로 내보낸 5남매에게 제때 먹을 곡식들을 싸 보내는 것이 노부부에게는 유일한 낙이다. 그렇게 여느 해와 똑같이 가을이 저무는가 싶었는데, 엄순분 할머니의 가슴 속에는, 거꾸로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찾아왔다.

고추를 따다 말고, 수수도 털다 말고, 툭하면 휑하니 집을 나서는 엄순분 여사. 콧노래 흥얼거리며 도착한 곳은 노래극 연습실이다. 산골 할머니에서 여배우로 거듭나는 현장, 지난 9월에는 서울서 첫 번째 공연도 올렸다. 함께 무대에 서는 배우 둘은 정선 아라리를 공부하고 악극단에 몸담았던 젊은이들, 배우 엄순분은 공연을 열고 닫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순분 할머니에게 배우라는 이름을 달아준 이는 옆 마을에 사는 권혜경씨(54). 정선아리랑으로 노래극을 만들던 중,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엄순분 할머니와 나물을 캐러 갔다가 할머니의 재능을 발견했단다. 전문 소리꾼은 아니지만 구수한 소리가 심금을 울렸고, 지나온 삶을 들어봤더니 이것이 바로 '여자의 일생'이 아니던가. 곧바로 엄순분 할머니의 인생을 담은 노래극을 만들었단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엄순분 할머니는 일곱 살 무렵, 가리왕산 깊은 골로 이사를 왔다. 떼꾼이었던 아버지가 주색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눈까지 멀었으니, 9남매 몸 누일 땅을 찾자면 다른 길이 없었다. 곤드레 죽도 배불리 먹지 못할 만큼 곤궁했던 시절, 입 하나 덜자고 어머닌 열일곱 순분을 산 아래 마을로 시집 보내셨다. 그런데 시할머니에 시부모님, 시동생까지 삼시세끼 챙겨야할 식구가 열 둘. 술 좋아하던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고, 살아낸 것이 기적일 만큼 팍팍한 시절이었다. 굽이굽이 고단한 인생길, 견뎌온 힘은 바로 자식들이었다. 5남매가 하나같이 착하고 우애 깊으니 자식들 커가는 재미에 서러운 눈물을 삼켜왔다.

두 번째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대사도 몇 마디 늘었으니 맹연습을 시작했는데. 대본을 펼쳐놓아야 무슨 소용인가.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봤고, 글도 배우질 못했다. 이참에 글이라도 배워볼까, 영감님이 써준 자식들 이름부터 적어본다. 가을걷이에 공연연습에 뒤늦은 글공부까지, 생애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요샌 뭘 해도 재미가 있는 것이 살맛이 난다. 내 인생이 이렇게 술술 풀려도 되나 싶었는데,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가슴 통증, 갈비뼈에 문제가 생겼단다. 공연 팀과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연거푸 ‘괜찮다’며 연습을 이어가는 순분 할머니. 더욱이 지난 공연엔 고추 딴다는 핑계로 공연장을 찾지 않은 영감님까지 은근슬쩍 '보러 가겠다' 내색을 비췄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아픈 것도 참아가며 마음으로 아라리 고개를 넘어보는 엄순분 할머니다.

대추 떨굴 채비를 하는 경환 할아버지와 엄순분 할머니. 툭툭 내리치기만 해도 비처럼 쏟아지는 대추알. 여느 곡식들처럼 애써 가꾼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잘 자란 자식처럼 풍성한 결실을 맺은 대추 농사다.

정선 토박이인 경환 할아버지와 열일곱에 시집 온 엄순분 할머니. 노부부는 올해도 실한 대추와 함께 가을을 맞이했다. 푸근한 인심은 그냥 걸어두고 곧장 비닐 하우스로 향한다.

가을걷이로 채워지는 부부의 보물창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 보며 잘 말려두었다가 흩어져 사는 다섯 남매 집 앞으로 보낼 것들이었다. 그 재미로 뿌리고 거둔다. 내외가 칠십 문턱을 넘은지 오래. 일을 줄여야지 싶다가도 자식들이 두 손 무겁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해진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KBS1 방송화면 캡처]
기사제보 news@tvdaily.co.kr        최하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는 tvdaily 홈페이지(http://tvdaily.mk.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info@tv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