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데뷔 56주년 차, 77세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누리는 상황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관객을 울리고 웃기며 강렬한 메시지까지 던진 배우 나문희의 연기는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올해 나문희는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제작 영화사 시선)를 통해 관객들을 만났다. 지난 2007년 미국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의 만행을 증언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모티프로 한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를 유쾌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풀어내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는 재래시장에서 수선집을 운영하며 홀로 사는 할머니 나옥분(나문희), 구청의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영어'를 매개체로 운명적으로 엮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시장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오지랖을 부리고 신고하기 일쑤, 그간 제기한 민원 건수만 8000건에 달한다는 구청의 블랙리스트 나옥분은 민원처리팀에 새롭게 발령받은 원칙주의자 박민재와 대립하던 중 그에게 영어 강의를 부탁하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게 된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룬 영화라는 이유로 관객들의 각광을 받았다. 그간 위안부 문제가 드라마, 영화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영상화된 바 있지만, 전쟁 당시의 끔찍한 참상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연출 방식으로 한계를 드러냈던 것.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일상'이라는 주된 줄거리를 앞으로 내세웠고, 영화의 주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 위안부 이야기를 복선처럼 배치해 재미와 감동을 모두 잡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

나문희의 존재감이 빛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문희는 극 초반 시장 바닥을 휩쓸고 다니며 목소리를 높이는 오지랖 넓은 할머니의 모습부터 소녀처럼 천진한 모습으로 영어를 배우며 기뻐하는 모습, 지난한 과거사가 밝혀진 후 오랜 세월 묵혀둔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며 오열하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나옥분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했다. 극 중 나옥분이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역사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기며 관객들이 나문희라는 배우를 '잊지 않고' 꼭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나문희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은 56년의 세월 동안 그가 쌓아온 긴 필모그래피와도 궤를 같이 한다. 1961년 MBC 라디오 1기 공채 성우로 연예계에 데뷔한 나문희는 라디오 드라마 연기를 시작으로 드라마, 영화, 공연 등 전 분야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특히 노년에 접어든 최근까지도 그의 활약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호박 고구마"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거침없이' 코믹 연기를 펼치는가 하면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는 귀여운 매력마저 묻어나는 생활 연기를 펼쳤다. 또한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중후한 매력을 담아 인생에 황혼을 맞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등 명연기를 선보여 왔다.

이처럼 켜켜이 쌓인 나문희의 관록을 바탕으로 빛을 본 '아이 캔 스피크'는 가을 극장가에서 32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 180만명을 거뜬히 넘는 흥행세를 과시했다. 또한 나문희는 지난 10월 제1회 더서울어워즈를 시작으로 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청룡영화상,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여성영화인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6관왕에 올랐다. "이렇게 늙은 나문희가 상을 받다니,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상을 받으시길 바란다"는 그의 따스한 수상소감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감동케 했다.

나문희의 전성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11일 첫 방송을 시작한 종합편성채널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하 '그사이')에 출연해 또 한 번 열연을 펼치는 것. '그사이'는 인생을 뒤흔든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남녀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로, 나문희는 사고 후유증으로 약을 달고 사는 주인공 강두(이준호)에게 진통제를 파는 할머니 역으로 출연해 또 한 번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낼 전망이다.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개한 나문희, 그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