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정선아는 지난 2002년 중학생의 나이로 뮤지컬 '렌트'를 통해 데뷔했다. 뮤지컬에 푹 빠진 소녀는 이후로도 15년 간 꾸준히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걸었다. '지킬 앤 하이드' '드림걸즈' '아이다' '에비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대형 뮤지컬에서 계속해 주역을 맡아온 끝에 이제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됐다. 그런 그의 행보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소설 '오즈의 마법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소설 '위키드: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 이를 뮤지컬로 만든 '위키드'는 올해 한국 라이선스 공연 두 번째 시즌을 맡았다. 지난 시즌에 이어 정선아는 또다시 글린다 역을 맡았다. 글린다는 사랑스러운 성격을 무기로 백치미를 뽐내는 금발 마녀다.


처음 정선아가 글린다 역을 맡았을 때 뮤지컬 팬들의 의아함은 당연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주로 해왔던 정선아로서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깜찍함과 사랑스러움을 어필해야 하는 배역이었기 때문. 사실 그는 최근 들어 꽤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대형 공연의 여주인공을 꿰차던 그가 손에 꼽힐만큼 적은 분량의 조연을 맡는가 하면, 코믹한 연기에도 스스럼없이 몸을 던졌다. '위키드'의 왈가닥 마녀 글린다 역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이는 정선아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계기는 있었다. 지난 2013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마리아 역을 맡은 뒤 부터였다. 남자 투톱 배우가 극을 끌고가는 형식의 뮤지컬이라 비중이 적은 캐릭터였다. 그동안 줄곧 메인 자리를 놓지 않았던 정선아는, 그럼에도 작품에 매료돼 출연을 감행한 것. 그는 마리아가 돼 군중 속에서 함께 연기를 했다. 메인 자리에서 비켜나, 오히려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은 배역을 맡게 되니 주연이 가져야 할 책임감을 새롭게 느꼈다. 또 배역의 경중 역시 없음을 알게 됐다고. 그 이후 정선아는 변화를 맞이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캐릭터 변화를 이룬 '위키드'를 다시 찾았다.

2년 전 초연 무대를 통해 이미 글린다에 완벽 적응한 정선아는 "두 번째 출연이라 부담이 컸지만, 그 부담보다도 '위키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위키드'는 제게 정말 좋은 영향을 준 작품이에요. 제 인생의 지금 이 시점에서 글린다라는 배역을 만난 것이 너무나 감사하죠.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매 회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고 이 좋은 시간들이 지나가는 게 아까울 정도예요. 나이가 들어도 계속하고 싶은 작품이고, 매년 공연을 할 때마다 다시 불러 달라고 사정하고 싶을 정도죠."

다시 만난 '위키드' 무대에서 정선아는 다시금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연 무대에선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면, 올해는 조금 더 철이 든 것 같다고. 그는 "똑같은 작품을 다시 할 때 얻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며 "한 발 떨어져서 장면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내 배역인 글린다뿐만 아니라 '위키드'라는 작품을 향해 시야를 넓히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을 보는 시야뿐만 아니라 연기에 대한 깨달음까지 얻었다는 그다. 정선아는 글린다의 대표 넘버인 '파퓰러(Popular)'를 언급하며 초연 당시 겪었던 어려움을 회상했다. '파퓰러'는 자아도취에 푹 빠진 상태로 코미디 연기를 소화해야 하는 글린다의 대표 넘버다. 그는 "관객을 울리는 것보다 웃음을 주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관객들이 내 연기를 보고 웃어줄까'라는 생각에 얽매이니 무대가 어려워지더라"며 "결국 나 자신을 믿고 스스로가 즐거워하면서 연기를 해야 관객들도 배우를 믿고 행복해진다는 걸 이번 무대에서 깨달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위키드' 팀은 지난 5월 대구 공연을 시작으로 7월 개막한 서울 공연까지 쉴 틈 없는 여정을 이어왔다. 3월부터 시작한 연습을 따지자면 팀원 전체가 거의 반년 가량을 '위키드'와 함께 한 셈이다. 장기간의 강행군 때문이었을까, 정선아는 최근 심한 감기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한 정선아로서는 데뷔 15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고.

정선아는 이 일로 인해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은 듯했다. "다리가 붓고, 무릎에서 피가 나도 무대에 서지 않았던 날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그는 "관객들을 향한 죄송함, 동료 배우들을 향한 죄책감 때문에 며칠간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지난 며칠 간의 악몽을 떠올렸다.

하지만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정선아다. 그는 자신의 위기에 함께 가슴 아파해 준 따뜻한 '위키드' 동료들을 언급하며 "내 인생에 이런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그를 감동시킨 것은 초연부터 함께 해 온 상대역 박혜나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혜나 언니는 정말 천사 같은 동료예요. 이번에 제가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후에, 초연 때부터 고생했던 이야기들을 담아서 장문의 문자로 위로와 기도의 말들을 전해 줬어요. 몸조리를 마친 후에 처음 선 무대에서 만났는데, 2막 마지막 장면에서 저와 이중창을 하면서 오열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노래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꾹 참고 있는데, 저를 보면서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울음을 참고 있었어요. 무대가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제가 정말 행복하나 사람이라는 걸 다시 느꼈죠."


이처럼 또 한 번 성장통을 겪은 정선아는 "이제는 조금 더 무대 위에 단단하게 서고 싶다"고 말했다. 함께 무대를 책임지고 있는 동료 배우들을 위해서, 자신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뮤지컬 지망생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그다.

"글린다는 제 뮤지컬 인생이에요. 글린다는 철없는 모습으로 극에 처음 등장해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해 나가잖아요. 저에게도 주위 사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상처를 주던 어리고 처음이던 시절이 있었고, 나름의 행복과 아픔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뮤지컬'이라는 경주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주고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을 잊지 않고 살고 싶어요."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조혜인 기자]